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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후에 역사 여행의 키워드 응우옌 왕조 황궁 황릉

by thisisthe1 2024. 8. 5.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도시 후에를 여행하는 것은 베트남의 역사를 이해하는 첫걸음입니다. 여유롭게 후에에 머물면서 응우옌 왕조의 자취를 따라 황궁과 황릉을 둘러보면서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짚어보길 권합니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응우옌 왕조

응우옌 왕조는 1802년에 세워져 1945년까지 명맥을 이은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입니다. 1895년 프랑스가 베트남을 점령하기 시작한 이후 독립적인 왕조를 유지한 기간은 사실상 얼마 되지 않지만 응우옌 왕조는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응우옌 왕조 이전에는 힘센 가문들의 대립과 농민의 반란으로 내전이 계속되었고, 참파 왕국과도 전쟁을 이어왔으나, 응우옌 왕조가 베트남의 거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면서 베트남 왕조가 세워진 이래 가장 큰 영역을 다스리는 통일 왕조의 역할을 했습니다. 응우옌 왕조는 후에에 수도를 두어 황제가 직접 다스렸고, 남부와 북부에는 각각 총독을 임명했습니다. 응우옌 왕조를 세운 1대 황제인 자롱 황제는 남과 북을 통일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 애썼고, 2대인 민망 황제는 남부의 메콩강 유역까지 토지를 개간했습니다. 이 시대에는 남부의 쌀이 전국의 수요를 충당하고도 남아서 동남아와 중국으로 수출할 정도였습니다. 민망 황제에서 티에우치 황제, 뜨득 황제로 이어지는 시대에는 문학, 지리학, 역사학이 융성하면서 문화적인 역량과 경제력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러나 캄보디아와 태국 같은 주변 국가들과 세력 다툼이 일어나고, 지방 세력과의 다툼으로 국력을 소모했으며, 제국주의의 침입을 막아내기에는 응우옌 왕조의 힘이 부족하여 결국 13대 바오다이 왕을 마지막으로 응우옌 왕조는 끝이 났습니다. 후에에는 시대를 호령했던 응우옌 왕조의 황궁과 황릉이 여럿 남아 있습니다. 후에를 차분히 여행하는 동안 짧지만 강렬했던 응우옌 왕조의 문화와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습니다.

 

후에의 중심 후에성과 황궁

후에 성으로도 알려져 있는 베트남 후에의 황궁은 1802년부터 1945년까지 통치한 응우옌 왕조의 정치, 문화, 종교 중심지 역할을 했던 거대한 복합 단지입니다. 1대 황제인 자롱 황제의 의뢰로 건축되었습니다. 궁전 공사는 1804년에 시작되어 1833년 그의 후계자인 민망 황제의 통치 하에 완성되었습니다. 베이징의 자금성을 모델로 한 황궁은 구 시가지를 정사각형으로 둘러싼 후에 성채 내에 둘러싸여 있으며, 배치와 건축에서 프랑스의 영향이 혼합된 전통 베트남 건축 요소를 특징으로 합니다. 여기에는 풍수 원리에 따라 대칭 디자인으로 배열된 수많은 궁전, 사원, 성벽, 문 및 정원이 있습니다. 궁전의 복잡한 목공예품, 섬세한 조각품, 생동감 넘치는 칠기공예품은 베트남 장인의 예술적 기량을 보여줍니다. 황제들의 어머니가 살던 궁전과 연못이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으며, 황족들의 연회장소였던 왕실극장인 열시당, 화려한 도자기 모자이크로 치장된 왕실의 서재인 태평루는 황궁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무척 인기 있는 장소입니다. 베트남 전쟁, 특히 1968년 후에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황궁은 베트남의 풍부한 문화유산과 회복력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역사적 중요성과 건축학적 아름다움을 탐구하려는 학자와 관광객 모두를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후에를 상징하는 황제들의 황릉

후에 근교에는 응우옌 왕조의 역대 황제들이 자신의 황릉에 묻혀 있습니다.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황릉은 2대 민망 황제의 릉, 4대 뜨득 황제의 릉, 12대 카이딘 황제의 릉 등이 있습니다. 베트남 후에 향강 유역 근처에 위치한 민망 황제릉은 베트남 전통 ​​건축과 조경 디자인의 걸작으로, 민망 황제의 웅장함과 철학적 전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1840년 민망 황제의 지시에 따라 무덤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그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인 티에우치 황제가 1843년에 무덤 건설을 완료했습니다. 민망 황릉은 풍수의 원리를 구현하는 자연과 건축의 조화로운 조화를 특징으로 합니다. 레이아웃은 대칭적이며, 구조는 인상적인 다이홍몬 문에서 시작하여 일련의 안뜰, 파빌리온 및 예식장을 거쳐 캄케 산에 위치한 황제의 무덤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또한 이 부지는 호수, 소나무 숲, 정원으로 꾸며져 있어 조용하고 사색적인 환경을 조성합니다. 단지 전체의 복잡한 조각, 화려한 장식, 시적 비문은 민망의 학문적 성향과 유교 원칙에 대한 그의 헌신을 드러냅니다. 베트남 후에(Hue) 근처 고요한 소나무 숲에 위치한 뜨득 황제의 무덤은 1847년부터 1883년까지 통치한 4대 황제의 시적인 감성과 세련된 취향을 집약적으로 보여줍니다. 뜨득 황제는 자신의 재위 시절에 프랑스에게 나라를 넘기고 나서 1964년부터 3년간 자신의 무덤을 직접 세웠습니다. 뜨득 황제는 무덤이 완성되고 나서도 16년을 더 재위했고, 그동안 자신의 무덤 단지에 커다란 인공 연못, 50여 채의 건물들, 사냥을 즐겼던 호수와 섬까지 엄청난 규모의 황릉을 만들어 풍류를 즐겼습니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한때 베트남에서 가장 학식 있고 사색적인 황제 중 한 명에게 위안을 제공했던 고요한 아름다움과 성찰적인 분위기에 빠져듭니다. 12대 카이딘 황제는 1916년에서 1925년까지 재위하면서 1920년부터 자신의 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카이딘 황제는 자신의 능을 멋있게 건설하기 위해 직접 프랑스를 방문해 건축양식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중국식으로 만든 다른 황릉과 달리 카이딘 황릉은 목조 건물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지었고, 고딕 양식, 바로크 양식, 중국 양식, 힌두 양식이 모두 혼재되어 있습니다. 친 프랑스 정책을 추구하며 민심을 잃었던 카이딘 황제는 당시 국민의 세금으로 웅장한 황릉을 건설한다며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황릉의 규모 자체는 크진 않지만 후에의 황릉 중에서 가장 화려한 실내 장식을 자랑합니다. 사방에 금박을 둘러 휘황찬란한 내부에는 온갖 색깔의 도자기와 유리가 번쩍이고 용 문양이 물결칩니다. 독특한 미적 감각과 화려한 장인정신을 보여주는 이 황릉은 베트남 역사의 전환기를 상징하며, 전통과 현대의 영향이 융합되어 중요한 문화 및 건축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