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끄트머리의 강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였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의 다산초당에 머물며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가 강진 유배 초기에 머물렀던 사의재와, 아름다움을 즐기며 시를 남겼던 백운동 원림, 제자들과 함께 생활했던 다산 초당까지 다산 정약용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강진을 여행해 봅니다.
조선의 실학을 꽃피운 다산초당
전라남도 강진에 위치한 다산초당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과 깊은 인연이 있는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정약용(1762-1836)은 조선 정조 때 관직에 올랐으나, 천주교 탄압으로 인해 1801년부터 18년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유배 초기에는 강진읍 동문 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해남의 외갓집에서 마련해 준 거처인 다산초당에서 나머지 유배생활 10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다산초당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 활동을 펼쳤습니다. 다산초당 건물은 원래 목조 초가였으나 1936년에 노후로 인해 붕괴되어 없어졌던 것을 1957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그 자리에 목조 기와집으로 복원했습니다. 다산 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도 양쪽에 함께 복원해 두었습니다. 지금 현판에 판각된 ‘다산초당’이란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으로 멋스러움이 넘칩니다.
다산초당에 올라가면 서쪽으로 올라가는 작은 오솔길에 큰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에 다산선생이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겨 두었습니다. 다산초당 뒤편에는 차를 좋아했던 선생이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이 있고, 초당의 너른 바위는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입니다. 다산이 산의 물길을 끌어와 만든 연못 가운데에는 조그만 산처럼 돌을 쌓아 올려 연지석가산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산 선생은 연못에 잉어를 키웠는데, 이 잉어들을 보며 날씨를 짐작했다고 합니다. 동암을 지나 몇 걸음을 더 가면 다산 선생이 바다를 내려다보며 시름을 달랬다는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다산초당 주변에는 다산기념관, 백련사 등 다산 정약용과 관련된 여러 유적지가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면 다산의 학문과 정신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조선 시대 선비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산초당은 단순한 역사적 유적지를 넘어 한국의 전통문화와 학문,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곳으로, 방문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특별한 여행지입니다.
선비의 뜻이 담긴 사의재
강진 여행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사의재입니다. 사의재(四宜齋)는 다산 정약용이 1801년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묵은 곳입니다. 이곳은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이자 학문의 요람이기도 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죄인인 그를 가까이 하기를 꺼렸습니다. 그런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방을 내주고, 밥을 차려준 이가 바로 동문매방가라는 주막집의 할머니였습니다. 다산 선생은 주막집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고 유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낯선 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괴로워하던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주막집 할머니는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며 그를 깨우쳤습니다. 다산 선생은 그 말에 당신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 교재로 교육을 베풀고,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을 이곳에서 집필하였습니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4년 간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다산 선생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자신의 거처에 붙인 이름이 바로 사의재입니다. 사의재는 "네가지를 올바로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언어)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주문하며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이 네 가지를 바로 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습니다. 사의재는 뜻을 굽히지 않는 선비의 굳건한 기개를 상징하는 듯, 꼿꼿하게 그 자리에서 세월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의재는 동천정을 포함하여 모두 갈대로 엮은 초가이엉이 특색입니다. 사의재 앞에는 전통방식의 소박한 나무다리와 물이 흐르는 공간을 가로질러 주막채로 향하는 길, 고즈넉한 옛 모습의 토석벽과 동네어귀에서 집안이 보일 듯 말 듯 집집마다 둘러쳐진 낮은 돌담길, 전통적인 연못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다산 선생의 정신이 살아있는 이곳을 찾는 이의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동천정의 현판은 “동문샘의 정자”라는 뜻으로 다산선생의 제자인 황상의 글씨체를 집자했습니다.
사의재 옆으로 함께 서있는 주막집은 ‘동문매방가’라는 이름을 고스란히 가지고 남아 있습니다. 유배봇짐을 풀고 골방 하나(사의재)를 거처로 삼은 다산선생이 마음을 새롭게 다잡은 것은 주인 할머니의 배려와 공이 큽니다. 주막집 할머니의 인심과 뜻을 기리고자 강진군에서 사의재 복원과 함께 당시 주막을 재현하고자 실제 음식점이자 주막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당시 주막 할머니처럼 인심 좋은 주모 어르신이 여행자들에게 ‘다산밥상’을 대접합니다. 다산선생이 맛있게 드셨다는 아욱국과 조밥, 바지락 전과 새우부추전을 곁들인 한상 차림이 푸집합니다. 다산 선생이 머물렀던 이곳에서 그가 먹던 밥상을 받으며 사의재를 돌아보며 다산의 유배 생활을 상상해 보고, 강진의 맛과 멋을 느껴보는 것은 강진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것입니다.
다산이 즐겨찾던 백운동원림
강진 백운동 원림(園林)은 고려시대에 백운암이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입니다. 계곡 옆에 ‘백운동(白雲洞)’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 있습니다. 백운동이란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약사암과 백운암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집니다. 백운동의 아름다운 정원인 백운동원림은 조선시대 이담로가 조성한 별서 정원으로 월출산 옥판봉 남쪽에 자리합니다.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배합된 배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을 이루며 우리 전통 원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백운동원림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다산 선생은 1812년에 이곳에 다녀간 뒤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제자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자신은 백운동 원림의 12승경을 노래한 시문을 남겼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백운동12승사>의 시와 초의선사의 <백운동도>가 담긴 <백운첩>뿐만 아니라 김창흡, 김창집, 신명규, 임영 등이 원림의 경치를 향유한 기록과 조영자 이담로의 후손들이 경영하여 온 기록이 내려오고 있는 백운동정원은 조경사적 가치가 탁월한 곳입니다. 월출산을 배경으로 원림을 조영한 유래 및 의도를 알 수 있으며, 내원에 화계를 만들어 지형을 자연스럽게 보전하고 계곡물을 두 곳의 연지에 끌어들여 정원을 가꾼 경관처리기법이 우수합니다. 특히 수려한 옥판봉의 지세와 아름다움을 빌려온 정선대의 경관 등 정약용이 제시한 12곳의 경치가 온전히 남아 있는 한국 전통원림의 백미로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현재의 백운동원림은 다산 선생의 시와 초의선사의 그림을 근거로 호남의 유서 깊은 전통별서의 모습을 복원해 두었습니다. 백운동 정원은 담양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세연정 등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일컬으며 조선중기 선비들의 은거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또한 정약용, 초의선사, 이시헌 등이 차를 만들고 전해주며 즐겨온 기록이 남아있는 우리나라 차 문화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이 정원을 거닐다 보면, 풍경 속에 울려 퍼지는 다산의 지혜와 아름다운 경치에 푹 빠져들어 역사적 성찰과 평화로운 휴식을 동시에 누릴 수 있습니다.